동양화를 전공한 박윤영(b. 1968)은 동양화적인 코드를 이용해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직접 채집하고 추적하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작업은 드로잉, 시, 영화, 설치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작가만의 은유적인 전달방식을 통해 우리가 믿고 있던 ‘사실’의 진실성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박윤영, 〈KLEENEX LANDSCAPE〉, 2003 ©아라리오갤러리

박윤영은 ‘픽토그램 산수’, ‘로고 산수’ 등 기존 동양화 작업 방식에 픽토그램이나 로고타입 이미지를 결합해 새로운 장르로서의 동양화를 선보여 왔다. 그리고 이러한 신선한 시도들은 작가가 주변에서 접한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으로부터 시작한다.
 
예를 들어, 〈KLEENEX LANDSCAPE〉(2003)의 경우에는 시중에서 판매하는 평범한 클리넥스 갑 티슈에 산수화를 그려 넣은 작업이었다. 산 모양처럼 뽑아 놓은 티슈 위에 그려진 산수화는 본래 갑 티슈 표면에 그려져 있던 수묵화 형태의 물고기와 조화를 이룬다. 또는 작가는 생수 브랜드인 에비앙과 볼빅의 로고에서 나타나는 산의 형상을 재해석하여 족자에 옮겨 ‘로고 산수’를 작업하기도 했다.

박윤영, 〈픽톤의 호수〉, 2005 ©국립현대미술관

박윤영의 작업은 이처럼 스스로 관심이 가는 것들에 대한 궁금증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그간 픽톤 농장 살인사건, 조승희 사건, 로히드 하이웨이, 리버뷰 정신병원, 다운타운 이스트사이드, 마틴 루터킹 암살사건, 베이커마운틴, 엑손발데즈 사건 등에 관심을 가져오며 그 사건들에 대해 추적하고 연구해 왔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사건의 단서를 찾을 뿐만 아니라, 박윤영은 직접 사건 현장에 방문하고 인터뷰를 진행한다. 이렇게 채집되고 유추된 사건과 연계된 단서들은 다시 작가의 상상을 통해 재구성되고 재해석된다.


박윤영, 〈픽톤 파라다이스〉, 2004, “익슬란 스탑” 전시 전경(아라리오갤러리, 2007) ©아라리오갤러리

박윤영의 대표작 〈픽톤의 호수〉(2005)는 ‘캐나다 픽톤 농장 살인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이는 캐나다에서 두 번째로 큰 농장 소유주인 로버트 윌리엄 픽톤(Robert William Pickton)이 지난 30여년간 여성 69명을 연쇄적으로 살해한 후 농장 돼지들의 사료로 사용하고 북미 지역으로 수출했던 엽기적인 살인사건이었다. 지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지역으로 뽑히는 밴쿠버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작가로 하여금 수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했고, 이는 영상, 병풍화, 설치 등 다양한 매체의 작품으로 재해석되었다.  
 
작가는 이 사건을 소재로 하는 첫 번째 작업으로 〈픽톤 파라다이스〉(2004)를 선보였다. 〈픽톤 파라다이스〉를 만든 후 박윤영은 이 사건과 연결될 수 있는 여러 이야기를 섞어서 ‘잠시 보였다가 사라지는 파란 기둥들’이란 글을 썼고, 이 글을 바탕으로 〈픽톤의 호수〉을 제작했다.

박윤영, 〈그림자 호수〉, 2005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캐나다 픽톤 농장 살인사건’에서 출발한 박윤영의 작업은 이처럼 작가의 상상력과 결합됨으로써 다양한 연결고리가 발생하고 사실을 기반으로 한 박윤영만의 픽션이 만들어진다. 2005년 안양예술프로젝트 커미션으로 제작된 〈그림자 호수〉 또한 그러한 연결의 연속으로 탄생한 작품이다.
 
작가는 이 살인사건에 발레 ‘백조의 호수’, 영화 ‘엘리펀트 맨’, TV 시리즈 ‘트윈 픽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헤밍웨이의 단편소설 ‘흰 코끼리 같은 언덕’, 팝송 ‘Jennie’s Got a Gun’, 살바도르 달리의 〈코끼리를 비추는 백조〉 등의 이야기들을 연결하고 교차시키며 사라진 여성들의 행방을 찾는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담은 병풍 〈그림자 호수〉를 안양에 설치하며 ‘낙원’이라는 뜻을 지닌 이곳에서 이 여성들이 평안을 얻기를 바랐다.


박윤영, 〈몽유생리도〉(부분), 2004 ©아라리오갤러리

박윤영은 어느 날 텔레비전에 나온 생리대 광고를 보고 ‘몽유도원도’를 떠올리게 된다. 그가 본 광고는 월경의 현실과는 다르게 이를 순수하고 이상적인 상태로 묘사하고 있었다. 작가는 이로부터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을 그리는 ‘몽유도원도’를 연결하게 된다.
 
우연히 본 TV 광고로부터 출발하여 새로운 연결고리를 만든 후 작가는 실제 생리대 위에 ‘몽유도원도’를 패러디한 작업 〈몽유생리도〉를 제작했다. 생리대 위에 먹을 이용해 그림을 그림으로써 생긴 먹의 번짐은 명료하지 않고 몽롱한 ‘몽유’의 상태와 닮아 있다.


“익슬란 스탑” 전시 전경(아라리오갤러리, 2007) ©아라리오갤러리

작가는 2007년 아라리오갤러리에서의 개인전 “익슬란 스탑”에서 카를로스 카스타네다(Carlos Castaneda)의 소설 ‘Journey to Ixtlan’을 보고 영감을 받은 작품들을 선보였다. 작가는 이 소설에 나오는 ‘익슬란’이라는 장소에 관심을 가졌다. 익슬란은 이 세상과 연결되어 있는 어떤 가상 공간이며 사랑이나 욕망 등의 성취 욕구를 버린 후 도달할 수 있는 곳, 즉 불교의 해탈에 가까운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박윤영은 전시를 통해 익슬란이라는 공간을 범죄나 재앙 등이 닿지 않는 곳, 다시 말해 이 세상의 나쁜 사건들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곳으로 승화시켰다. 작가는 이 전시에서 작가가 관심을 가져 왔던 비극적인 사건들(조승희 총격사건, 마틴 루터 킹 목사 암살사건, 픽톤 농장 살인사건 등)을 익슬란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새롭게 재현하고 재구성했다.


박윤영, 〈Water Sucks〉, 2007, “익슬란 스탑” 전시 전경(아라리오갤러리, 2007) ©아라리오갤러리

작가는 이러한 비극적인 사건들의 물리적인 방아쇠가 되었던 총과 같은 사물들을 병풍 화폭에 스케치 한 후, 이러한 비극을 멈추게 하는 제어장치로서 소설에 등장하는 익슬란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 세 가지(페요테, 짐슨위드, 싸일로싸이브)가 그것들을 뒤덮으면서 자라나는 모습으로 그렸다.

“YOU, Live!: 12개의 문고리” 전시 전경(일민미술관, 2019-2020) ©일민미술관

2019년, 박윤영은 9년만에 개최한 그의 개인전 “YOU, Live!: 12개의 문고리”를 일민미술관에서 선보였다. 전시는 작가가 쓴 새로운 시나리오 〈12개의 문고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연극-전시 플랫폼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12개의 문고리〉는 체르노빌, 후쿠시마 원전사고, 영국의 리비아 침공 등 동시대 특정 사건들을 조사하고 탐구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린 이미지와 텍스트를 자신의 개인적 경험들과 뒤섞어 재구성된 것으로, 12개의 뒤섞인 타임라인으로 구성된다.
 
전시는 마치 12개의 문고리 뒤에 감춰진 사건들을 추리해가는 일종의 미스터리 소설처럼 전개되었다. 관객을 주인공으로 이끄는 나레이션을 중심으로 진행된 이 전시는 스크립트, 사운드, 비디오, 드로잉, 조각, 아카이브의 유기적인 장치를 통해 관객의 상황에 개입하여 우연적이고 즉흥적인 상황을 연출했다. 그리고 시나리오 〈12개의 문고리〉는 연극 연출가 임형진의 포스트 드라마 연극 〈당신의 만찬〉과 시인 심보선의 에세이로 재창작되며 다양한 형태로 변환되었다.

“YOU, Live!: 12개의 문고리” 전시 전경(일민미술관, 2019-2020) ©일민미술관

박윤영의 작업은 이처럼 어떠한 사건에서 출발해 이를 파헤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유추하며 새로운 연결고리들을 만들어 가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그 여정 안에는 전혀 다른 사건들이 서로 결합되기도 하고, 작가 개인적인 경험을 매개로 새로운 이야기가 형성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작가의 작업은 언제나 열린 결말로 남아 작가의 상상 속에서, 그리고 관객의 상상 속에서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나아간다.

“내 작업은 스스로 관심 있는 것들에 대한 ‘궁금증’에서 출발한다는 것이 적절한 표현 같다. 그것에는 배후가 있고 단서가 있으며,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있다.” (작가노트 중)


박윤영 작가 ©연합뉴스

박윤영은 이화여자대학교 동양화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졸업하였다. 일민미술관(서울, 2019-2020),몽인아트센터(서울, 2010), 아라리오갤러리(천안, 한국, 2007)와 인사아트스페이스(서울, 2005)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개최한 바 있다.
 
또한 작가는 국립현대미술관(과천, 한국, 2010), 아뜰리에 에르메스(서울, 2009), 중국 국립미술관(베이징, 2007), 리움미술관(서울, 2006), 유네스코(파리, 2006) 등의 국내외 유수 기관에서 진행된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박윤영은 현재 서울과 캐나다에서 거주하며 활동하고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