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아(b. 1968)는 한국,
네덜란드, 터키 등 여러 지역에 거주한 경험을 토대로 사회의 시스템 안에 존재하는 개인과
집단, 그리고 사회화된 자연에 대한 작업을 해오고 있다. 그는
이러한 주제를 바탕으로 영상 뿐 아니라 조각, 설치, 오브제
등 다양한 매체를 실험적으로 설치하는 작업을 선보여 왔다.
미디어 아티스트로서 함양아는 개인의 삶에서 출발해 우리 사회의 단면들을 은유적으로 서술하는 독특한 내러티브를
작품에 담아낸다.
함양아는 뉴욕으로 넘어가 비디오아트를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미시적인 존재의 실존에 대한 이야기를 영상으로 담아내는 작업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치즈〉(1996-1997)는
치즈가 부패하는 과정을 담아 내며 삶과 죽음이라는 생명의 순환에 대해 은유적으로 표현한 영상 작업이었다.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룸으로써 ‘시간’이라는 요소가 필연적으로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요소가 된다. 〈감각의
공간〉(1998)의 경우, 작가가 직접 콩나물을 심어 기르고
결국에는 시들어 죽는 모든 과정을 기록한다. 이처럼 작가의 작업은 삶의 과정에 대한 시간의 흐름을 옆에서
오랫동안 지켜보는 데서 출발한다. 그리고 작가는 프레임 단위로 작업을 오랜 시간 동안 진행함으로써 대상의
실존적 순간과 삶의 과정을 면밀하게 담아낸다.
이처럼 함양아의 초기 영상 작업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물질의 변화와 삶이나 감각적이고 촉각적인 이미지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픽셔너리〉(2002-2003)를
시작으로, 그의 영상은 ‘시간성’과 ‘감각’에서 ‘서사’로 이행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부터 작가는 스튜디오 안이 아닌 바깥에서 움직이는 대상에 대한 작업을 진행하기 시작한다.
〈픽셔너리〉는 작가가 독립영화의 미술감독으로 일하면서 제작한 영상으로, 영화
제작과정을 매일 기록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 영상에는 촬영되고 있는 영화의 허구 세계와 이를 실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스태프들의 현실 세계라는 두 개의 세계가 공존한다. 이 두 세계는 분할된 장면들 속에
중첩되거나 교차 편집으로 번갈아 보이다가 마침내 하나의 앵글 안에 모두 등장한다. 제목 ‘픽셔너리(fiCtionaRy)’가 의미하듯, 이 영상은 허구 세계와 그것을 포함하는 현실 세계를 겹친 일종의 다큐멘터리 픽션이라 할 수 있다.
함양아, 〈땅, 집, 도시〉, 2006 ©부산비엔날레
2005년 이후부터 작가는 작업 방식에 또 한번의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2005년까지의
작업은 먼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대상을 촬영하고 편집하는 과정에서 그 대상에 대해 어떤 식으로 이야기해야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방식이었다. 작가는 이러한 과정에서 대상과 관계를 형성하게 되면서 그 관계 속에서 윤리적인 책임을 느끼게 되었고 인물을
작품 안에서 어떻게 드러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이러한 고민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상 〈땅, 집, 도시〉(2006)는 작가가 만들어 낸 이야기, 즉 픽션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땅, 집, 도시〉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통해 전 세계를 돌아다녔던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동하는 삶의 각기 다른 모습들을 작가가 만들어 낸 허구의 인물들로 그려내는 작업이다. 그리고 작품 속 인물들 중에서 한 명은 사실 현실의 인물로, 만들어진
이야기 속에 실제의 삶을 껴 넣음으로써 작가는 사실과 비사실이 혼재하도록 했다.
〈땅, 집, 도시〉는
함양아 자신의 경험과 그가 만난 사람들의 경험에서 비롯된 서사를 바탕으로, 세계화 시대에 개인의 정체성이
자신이 태어난 지역이나 언어에 의해 고정되기 보다는 이동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경험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후 함양아는 우리 사회에 내재된 이데올로기와 사회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를 작품으로 풀어냈다. 이에 대한 첫 시작으로 작가는 예술계 내에 존재하는 권력을 주제로 다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큐레이터들을 모델로 만든 초콜릿 두상 조각 〈초콜릿 두상〉(2007)을 가지고 퍼포머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행위를 이어가도록 한 〈아웃 오브 프레임〉(2007)이 대표적이다.
작가는 권력이라는 힘은 주변에 의해 형성된다고 보았다. 〈아웃
오브 프레임〉은 이러한 권력이 형성되는 과정을 담아내는 퍼포먼스 영상으로, 작가의 지시 없이 초콜릿
두상 조각을 둘러싸고 자율적으로 벌어지는 퍼포먼스 과정을 통해 그러한 모습을 포착해 낸다.
퍼포머들은 작업을 진행하면서 서로 경쟁의식이 생기기 시작해 어떤 사람들은 과감하게 행위를 이어가거나 어떤 사람들은 뒤로 물러나 있게 된다. 그리고 처음에는 초콜릿 두상을 핥거나 애무하다가 나중에는 점점 과격해지면서 두상을 파괴하기에 이른다. 작가는 이러한 흐름을 역으로 돌림으로써 사람들이 마치 권력을 만들어가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편집했다.
2010년 아트선재센터에서의 개인전 “함양아: 형용사적 삶 – 넌센스 팩토리”에서 작가가 만들어낸 사회 안에서의 개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 〈넌센스 팩토리〉(2010)를 발표했다. 〈넌센스 팩토리〉의 배경인 가상의 ‘팩토리’는 창조성과 생산성을 추구하지만 부조리한 현실이 드러나는 하나의 사회이다. 그 안에서 삶을 이어가는 개인들은 꿈을 꾸고 성실히 일을 하지만 결국 소외를 반복적으로 경험한다.
작가의 이러한 픽션은 현실과 동떨어진 가상이 아닌 현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넌센스 팩토리〉는 현실 속 사회 시스템과 그 안에서 부단히 살아가는 개인들의 삶을 가상의 사회를 통해 빗대어 드러냈다면, 세월호 참사를 배경으로 한 〈잠〉(2015)은 개인을 통제하고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회 시스템과 규율 안에서 개인들의 두려움과 불안을 픽션의 형식으로 은유적으로 담고 있다.
함양아는 2014년부터 작가로서 이 사회 안에서 무엇을 해야하는지, 즉 예술적 실천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한 작가의 질문은
자연스럽게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사회에 닿았고, 함양아는 정치 시스템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을 통한 작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포토 몽타주 작업인 〈정의되지 않은 파노라마 2.0〉(2019)은 지금 현대 인류에 관한 풍속화다. 작가는 2018년에 우선 스케치로 작업하였는데, 이때 현재 정치 시스템이 갖는
2차원적 정부 조직도와 이를 넘을 수 없는 장벽을 작업의 배경으로 제작했다. 작가는 조직도 안의 인물들과 그 밖의 인물들을 연필 드로잉으로 그린 다음 인물들의 행위를 영상으로 제작하여
그 위에 덮었다.
함양아의 작업은 현재의 시스템이라는 무대 안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는 일종의 인형극을 보여준다. 작가는 그 안에 인물들은 평면 위에 ‘구성’의 요소로서 존재하기 보다는 ‘구축’의
개념에서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이는 러시아 구축주의에서 빌려온 표현으로, 미적인 과정으로서 이미지를 구성하는 것과 달리 구축은 현실세계의 리얼리티를 추상화하여 이미지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작가는 이미지가 본래 갖는 리얼리티의 맥락에서 요소를 이끌어와 새로운 무대 위에 배치시키면서 재구축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즉 함양아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개인들의 삶이라는 리얼리티를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경계를 오가며 추상화함으로써 우리 사회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있다.
“대상을 보고 대상에 대해서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그것을 파악하고자 해요. 동물적 감각, 이성, 직감
모든 것을 이용해 대상을 파악하고 그것에 대해서 인식하고 사유해서 얻게 된 제 나름대로의 결론이 바로 리얼리티일 것입니다.
머릿속에 있는 리얼리티를 다시 현실로 가져와서 현실 공간에서 재구축하는
것. 그것이 제가 볼 때는 예술작품을 생산하는 창작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MMCA 작가와의 대화 | 함양아 작가)
함양아 작가 ©더 아트로. 사진: 박홍순
함양아는 서울대학교에서 회화, 동대학원에서 미술이론을 공부한 후 뉴욕대학원에서 미디어아트를 전공했다. 주요 전시로는 “트랜스-저스티스”(타이베이 시립미술관, 2018), 아시아아트 비엔날레(대만국립현대미술관, 2017), 미디어시티서울 비엔날레(서울시립미술관, 2016), “불협화음의 하모니”(아트선재센터, 히로시마 시립미술관, 타이베이 관두미술관, 2015-2016), “올해의 작가상”(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13) 등이 있다. 200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올해의 예술상을 수상했고, 2006년부터 2007년까지 암스테르담 라익스아카데미 레지던시에 참여했다.
References
- 올해의 작가상, 함양아 (Korea Artist Prize, Yang Ah Ham)
- 국립현대미술관, 함양아 | 픽셔너리 | 2002 – 2003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MMCA), Yang Ah Ham | fiCtionaRy | 2002-2003)
- 일민미술관, 함양아_정의되지 않은 파노라마 2.0 (Ilmin Museum of Art, Yang Ah Ham_Undefined Panorama 2.0)
- 2006 부산비엔날레, 함양아 – 땅, 집, 도시 (2006 Busan Biennale, Yang Ah Ham – Land, Home, City)
- 아트선재센터, 함양아: 형용사적 삶 – 넌센스 팩토리 (Art Sonje Center, Yang Ah Ham: Adjective Life in the Nonsense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