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작가이자 영화감독과 작가로 활동중인 박찬경(b. 1965)은 냉전, 분단, 전통, 종교 등의 주제를 통해 서구식 근대화와 경제 성장을 무모하게 쫓아온 한국의 모습을 기록하며 한국 사회를 고찰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박찬경은 예술가로서 활동하기 전에는 미술에 대한 글을 쓰거나 전시를 기획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그의 형인 박찬욱 영화감독과 함께 ‘파킹찬스(PARKing CHANce)’라는 이름으로 미디어 아티스트 듀오로서 활동을 해오고 있다.


박찬경, 〈세트〉, 2000 ©리얼디엠지프로젝트

박찬경은 1997년 금호미술관에서의 첫 개인전 “블랙박스: 냉전 이미지의 기억”을 시작으로, 한국의 분단과 냉전을 대중매체와의 관계나 정치 심리적인 관점에서 다루는 사진이나 영상 작업을 선보였다.
 
예를 들어, 〈세트〉(2000)는 남과 북에 지어진 세트장을 촬영한 사진 160장을 슬라이드 형식으로 교차시킨 작업이다. 여기에는 서울의 건물과 거리의 모습을 모방한 북한 국립영화촬영소의 세트장, 한국에서 시가전 촬영을 위해 설계된 세트장, 그리고 남북한의 공동 지역이라 할 수 있는 DMZ의 판문점과 경관을 정확하게 재연한 〈공동경비구역 JSA〉의 영화 세트장을 촬영한 사진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인공적인 사진들의 허구적 배열로써, 이미지 속에서 실제 장소의 지리적 좌표와 맥락은 해체되고 관객은 시간과 공간을 식별하기 어렵게 된다.


박찬경, 〈비행〉, 2005 ©리얼디엠지프로젝트

2000년 6월, 6.25 전쟁 이후 처음으로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됨에 따라 남북 직항로가 개설되었다. 이에, 박찬경은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회 위원장을 만나러 가는 1시간 동안의 비행 모습과 한국전쟁 당시의 모습을 약 13분의 분량으로 편집한 영상 〈비행〉(2005)을 제작하게 된다.
 
이 영상에는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만든 윤이상의 음악 〈더블 콘체르토〉의 앞부분이 사운드트랙으로 사용되었다. 〈비행〉은 북한의 마을, 공항, 환영 인파 등을 교차하면서 보여주며 냉전과 탈냉전을 오가는 한반도 분단 상황의 단면을 드러낸다.

박찬경, 〈신도안〉, 2007 ©국제갤러리

이후 박찬경은 2008년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의 개인전 “신도안”에서 영상 작업 〈신도안〉(2007)을 발표하면서, 한국의 민속신앙과 무속을 통해 한국의 왜곡된 근대화 그리고 우리의 현재를 새롭게 바라보는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박찬경: 신도안”(2008) 전시 전경 ©아뜰리에 에르메스

전시 “신도안”은 한국 민속신앙의 오랜 성역인 충남 계룡시 남선면 일대에 위치한 신도안이라는 공간의 과거와 현재를 담은 45분짜리 다큐멘터리 영상 〈신도안〉, 기록사진, 그리고 건축모형으로 구성되었다.
 
작가는 조선시대부터 일제 강점기와 근현대를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억압되어 온 ‘신도안’을 재조명하는 데서 출발했다. 〈신도안〉은 이 지역에서 사이비 종교로 취급되는 ‘계룡산 문화’에 대한 우리의 역사와 태도에 주목하고 미신적 세계와 그러한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감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며 왜곡된 한국의 근대사를 재구성한다.

박찬경, 〈만신〉, 2014 ©국제갤러리

이러한 한국의 전통적인 민속신앙이나 무속을 통해 근대성과 현재를 다시 성찰하는 작업은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안양에〉(2010), 〈만신〉(2014), 〈시민의 숲〉(2016) 등으로 이어 졌다. 그 중, 무당 김금화의 삶을 통해 한국 현대사와 치유의 이야기를 담은 〈만신〉은 극장에서 개봉되기도 했다.

박찬경, 〈시민의 숲〉, 2016 ©국립현대미술관

〈시민의 숲〉은 한 폭의 산수화처럼 펼쳐진 3채널 비디오-오디오 작품으로,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비평적 작업이자 격변 속에서 이름 없이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애도이다. 작품 속 산을 둘러싸고 행군하는 인물들은 동학농민운동, 한국전쟁, 5·18 민주화 운동, 세월호 참사 등 역사 속 비극적 사건들의 희생자들이다.

〈시민의 숲〉 설치 전경(국제갤러리, 2017) ©국제갤러리

박찬경은 시인 김수영(1921-1968)의 〈거대한 뿌리〉(1964)와 화가 오윤(1946-1986)의 미완성작 〈원귀도〉(1984)에서 영감 받아 〈시민의 숲〉을 제작했다고 한다. 작가는 전통과 민속신앙을 다루는 두 작품을 통해 희생의 역사가 아무리 참혹하더라도 뒤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함을 이야기한다. 또한, 한국의 현대사 속에서 희생된 무명의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동시에 여전히 극복하지 못한 한국 근대성의 한계를 드러낸다.

박찬경, 〈늦게 온 보살〉, 2019 ©국립현대미술관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 시리즈 전시에서 선보인 〈늦게 온 보살〉은 현대의 재난과 불교에서 전하는 에피소드를 통해 우리 사회를 묘사하는 흑백 네거티브의 영상 작업이다.
 
〈늦게 온 보살〉은 방사능으로 오염된 장소를 배경으로 한다. 그 안에는 산 속 방사능 오염도를 측정하며 다니다가 사찰에서 자신의 전생을 보게 되는 주인공, 그림을 그리고 물건을 만드는 청년들, 그리고 보살이 등장한다. 자연, 불교 신화, 원자력 발전소, 미술 등의 이러한 이미지들은 서로 특별한 이해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면서 묘한 마찰을 일으킨다. 작가는 이를 통해 개연성을 잃어버린 사회를 은유적으로 묘사한다.


“MMCA 현대차 시리즈 2019: 박찬경 – 모임 Gathering” 전시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이처럼 박찬경은 과거로 시선을 돌려 현재를 재인식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작가는 우리의 역사 안에서 왜곡된 지점들을 들추어 내고 그 안에서 소외된 존재들을 위로한다. 나아가 이러한 작업을 통해 우리의 현재를 새롭게 직시하도록 함으로써 우리의 미래 또한 생각하도록 만든다.


박찬경 작가 ©국제갤러리

박찬경은 1988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995년 미국 캘리포니아 예술대학에서 사진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2014년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 서울”의 예술감독을 맡으며 기획자로도 활동했다.
 
작가는 독일 세계문화의 집(2017), 타이페이 비엔날레(2016), 안양 공공예술프로젝트(2016), 런던 이니바(2015), 아트선재센터(2013), 아뜰리에 에르메스(2008, 2012) 등 국내외 유수의 기관에서 열린 개인전과 그룹전에서 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이외에도 2004년 에르메스 코리아 미술상을, 2011년 〈파란만장〉으로 베를린 국제영화제 단편영화부문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주요 소장처로는 국립현대미술관, KADIST예술재단, 프랑스 낭트 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아트선재센터 등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