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의 표면을 재구성한 직물 조각으로 잘 알려져 있는 작가 서도호(b. 1962)는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집, 물리적 공간, 감정의 전이, 기억, 개인성 및 집합성의 문제에 의문을 제기하는 작업을 해왔다. 그는 지난 30여 년간 흥미롭고 독창적인 조각, 설치, 영상 작업을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쌓아왔다.
서도호, 〈바닥〉, 1997-2000 ©국립현대미술관
서도호는 20대 후반 미국으로 이주한 이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해왔다. 정체성에 대한 그의 관심이 이어져 제작된 <바닥>은 이질적인 혹은 동질적인 문화 속에서의 ‘자아’라는 본질적 의문에 대한 탐구를 담고 있다. 폴리염화비닐(PVC)로 만든 수 만개의 작은 인물상들이 팔을 뻗쳐 손바닥으로 유리판을 지탱하고 있는 이 작품은 백인, 황인, 흑인, 남성, 여성의 서로 다른 인종과 성별로 이루어진 인물상들로 반복 배열되어 있다. 이 작품 속 개별 초상들은 정형화된 모습으로 고도의 기술화, 정보화, 세계화된 시대에서 개인과 집단, 정체성과 익명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서도호, 〈떨어진 별 1/5〉, 2008, 헤이워드 갤러리 “Psycho Buildings” 전시 전경 ©리만머핀
작가의 이주의 경험은 자연히 집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그에게 ‘집’은 정착과 안정감의 공간인 동시에 떠남과 머무름이 반복되는 모순의 공간이기도 하다. <떨어진 별 1/5>는 한옥집이 한 건물에 별동별처럼 날라와 충돌한 모습을 실물 사이즈의 1/5 크기로 축소한 설치 작품이다. 실제로 두 건물은 작가가 거주했던 집의 모습이다.
한옥집은 작가가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서울 성북동의 집의 모습이며, 서구식 건물은 미국 유학 시절 살았던 브루클린의 아파트를 본 뜬 것이다. 집의 외부 뿐만 아니라 내부를 구성했던 실제 물건과 구조를 재현한 작업이다. 이 작품은 이처럼 작가의 개인적 경험이 스며들어 있다. 갑작스러운 별동별의 충돌처럼, 전혀 다른 세계로의 갑작스러운 전이된 상황을 담고 있다.
서도호,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 2013, 국립현대미술관 “한진해운 박스 프로젝트: 서도호” 전시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집에 대한 작업은 작가가 거주했던 한국, 로드아일랜드, 베를린, 런던, 뉴욕 집의 표면을 재구성한 거대 직물 조각으로 이어졌다. 물리적·은유적 공간의 유연성에 천착해 온 작가는 신체가 공간과 관계를 맺고 그 안에 거주하며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탐구한다.
특히 그는 가정의 실내 공간과 집의 개념이 특정한 장소와 형태, 역사를 지닌 건축물을 통해 명료화되는 과정에 주목한다. 작가에게 있어 우리가 거주하는 공간은 심리적 에너지를 담고 있으며, 작품을 통해 그는 지리적 장소와는 무관한 기억, 개인적 경험, 안정감 등의 지표를 가시화한다.
작가가 직접 살았던 사적인 공간인 집의 내외부의 세부적인 모습까지 천으로 본 따 지어 만든 집 시리즈는 미술관이라는 공공의 공간 안으로 옮겨져 관객들이 오가는 타인의 공간이 된다. 그에게 집은 아주 사적인 공간인 동시에 개인과 개인이 관계를 맺는 사회적 공간이기도 하며,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이 뒤섞인 혼재된 공간이다.
서도호, 〈뉴욕 웨스트 22번가 348번지–A 아파트, 복도, 계단〉, 2012 ©서도호
“사는 공간은 바뀌지만 살았던 공간에 대한 기억은 거미줄처럼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하는 것 같다. 달팽이가 집을 이고 가는 것처럼 그 기억을 안고 다른 곳으로 간다. 은조사 같은 실크를 사용하면 창호지를 통해 비치는 은은한 빛이라든지 열린 공간의 특징을 잘 보여줄 것 같았다. 전등 스위치, 콘센트까지 완벽하게 만든 것 역시 마찬가지다. 뉴욕과 서울의 전등 스위치가 다른데 이런 걸 정확하게 보여줘야 나 스스로도 공간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킬 수 있겠다 싶어 더 꼼꼼하게 만들었다.” (LUXURY 매거진, 서도호 인터뷰, 2012년 5월호)
서도호 작가. 사진: Daniel Dorsa ©호주현대미술관
서도호는 1994년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에서 회화 전공으로 학사 학위를, 1997년 예일대학교에서 조각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작가의 주요 개인전은 리만머핀 뉴욕, 런던, 홍콩, 팜비치를 비롯하여 호주 시드니 현대미술관(2022),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2022), 영국 런던 블룸버그 스페이스(2021),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2019) 등이 있으며, 오는 2025년 5월에 런던 테이트모던에서 개인전이 개최될 예정이다. 그리고 올 4월부터 미국 워싱턴 D.C. 스미스소니언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 프리어 플라자에 설치 작품 <공인들>을 전시하고 있다.
최근 그가 참여한 그룹전으로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미술관의 “The Shape of Time: Korean Art after 1989”(2023), 런던 드로잉 룸의 “UNBUILD: a site of possibility”(2023) 등이 있으며 싱가포르 비엔날레(2019), 베니스 비엔날레(2018), 광주 비엔날레(2012), 리버풀 비엔날레(2010),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2010), 이스탄불 비엔날레(2003), 시드니 비엔날레(2002) 등 다양한 비엔날레에 초청받아 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서도호의 작품은 뉴욕 현대미술관, 뉴욕 휘트니 미술관,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런던 테이트모던, 리움미술관, 아트선재센터, 모리미술관, 가나자와 21세기 현대미술관을 포함한 전세계 유수의 공공 및 사립 기관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