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b. 1964)은 날카로운 사회 비판과 역사 의식, 유토피아에 대한 인본주의적 탐구를 통해 작가 자신의 개인적 이야기를 작품에 투영해 왔다. 그리고 작가는 영화와 문학, 현대 건축, 한국과 유럽의 역사 등 다양한 자료에서 영감을 얻어 환상적이고도 종종 당혹스러운 디스토피아적 시각을 담은 하이브리드한 형태를 선보이며 세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이불, 〈수난유감-내가 이 세상에 소풍 나온 강아지 새끼인 줄 아느냐?〉, 1990 ©서울시립미술관

한국의 박정희 군부 독재 시절, 반체제 인사였던 부모 밑에서 태어난 이불은, 1980년대 말 자신의 신체를 작업의 주제이자 대상으로 삼은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임으로써 본격적으로 작가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작가의 초기 퍼포먼스는 정치적 박해와 제한적인 성 역할에 관한 사적이고 감정적인 효과를 시각적인 형태로 전달한 것이었다.

가령, 여러 개의 촉수가 달린 괴물과 같은 형상의 ‘소프트 스컬프처’를 입고 서울과 도쿄 시내를 12일간 돌아다닌 퍼포먼스 작업 <수난유감-내가 이 세상에 소풍 나온 강아지 새끼인 줄 아느냐?>는 작가의 몸이 직접 작업의 주체가 되어 화제가 된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이다.


이불, 〈장엄한 광채(Majestic Splendor)〉, 1997 사진: Robert Puglisi ©이불 스튜디오

작가 이불을 세상에 알린 또 다른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장엄한 광채(Majestic Splendor)>가 있다. 1997년 뉴욕현대미술관에서의 전시에서 선보인 이 작업은 화려하게 장식된 날 생선 98마리를 투명 비닐봉지에 밀봉해 설치한 것으로, 아름다움의 덧없는 속성과 여성의 무력함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생선이 부패하며 심해지는 악취로 인해 결국 개막 전날 작품을 철수하게 되었지만, 세계적인 큐레이터 하랄트 제만이 이 작품을 주목하게 되면서 유럽 미술계에 이불을 알리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이불은 제4회 리옹비엔날레에 초청되어, 전시 기간 동안 생선이 서서히 부패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장엄한 광채>을 선보일 수 있었으며 이로써 세계 미술계 인사들의 눈도장을 찍었다.


이불, 〈사이보그 W1-W4〉, 1998 사진: 윤형문 ©이불 및 아트선재센터

이불의 <사이보그> 연작은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과 영화 속에 등장하는 사이보그들의 낯익은 이미지이지만, 완전한 모습이 아닌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거나 팔다리가 없는 비정상적인 형상을 하고 있다.

섹슈얼하면서 해부학적으로 확실한 형태가 없는 로봇의 형태로 구성되었으며, 유전공학과 복제, 성형 수술을 둘러싼 욕망과 불안을 함축한다. 사이보그의 초기 재료인 실리콘은 여성들의 성형수술을 위한 인체 보형물로 사용된다는 점에서도 이상적인 몸매에 대한 여성의 열망이나 이를 바라보는 남성의 시선을 떠올리게 한다.

머리와 한쪽 팔다리가 없이 허공에 매달린 사이보그의 모습은, 인체를 보완하고 인류에게 새로운 희망을 열어줄 것처럼 보이는 테크놀로지의 완벽성이라는 신화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러한 그녀의 작업은 초기 작업과 지속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으며, 예술과 문화, 기술,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지탱하고 있는 부계적 사회계급구조에 대한 재고를 유도하면서 한편으로는 그것의 전복을 꾀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이불, 〈취약할 의향〉, 2015-16, 제20회 시드니비엔날레 전시 전경 ©타데우스 로팍

이불은 2000년대 중반부터 근대적 이상주의를 은유적으로 형상화한 대형 설치 조각작품을 선보여왔다. 거대한 은빛의 비행선의 모양을 한 <취약할 의향>은 1937년 5월 힌덴부르크 비행선 폭발로 승객 35명이 사망한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이는 20세기 초 모더니티의 상징물인 힌덴부르크 비행선을 모티프로 하여 당시 과학 기술의 진보를 통한 유토피아에 대한 인류의 욕망을 투영한다.

동시에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시도하고 실패하고 그래도 또 시도하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설명했다. 인류는 앞으로 나아갈 욕망을 지닌 동시에 완벽하지 못한 취약한 존재이며, 그럼에도 시도하려 애쓰는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이불의 작업은 이처럼 아름다움과 공포, 연약함과 힘 사이에 걸쳐 있다. 희망과 절망이 공존하는 그의 작업은 자신과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고찰을 유도한다.

“나는 내가 작업하는 것을 신중하게 선택한다. 모든 것에는 함축된 의미와 이야기가 있고 나는 그것들을 활용한다. 또한 재료가 가진 일반적인 의미를 차용하여 작업에 수용한다. 대부분의 경우는 충돌하거나 상충하는 함축적인 의미, 또는 다층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작가 이불 ©타데우스 로팍

이불은 뉴욕 현대미술관, 뉴뮤지엄,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무담 룩셈부르크,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 등 세계 최정상급 미술기관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2012년 아시아 여성작가 최초로 도쿄 모리 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개최했으며, 베니스 비엔날레 본 전시에 한국작가로는 유일하게 두 차례 초청되어 (1999, 2019) 동시대 최고작가로서의 위용을 증명하였다.

2023년에는 한국 작가 최초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건물 정면에 작품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이불은 1998년 휴고보스상 최종후보, 1999년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상, 2014 년 광주비엔날레 눈예술상, 2019년 호암상 예술상 수상자로 선정된 바 있다. 그의 작품은 삼성 리움미술관, 아트선재센터, 가나자와 21세기 현대 미술관,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