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과 서울을 오가며 활발하게 활동 중인 양혜규(b. 1971)는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동시대 작가 중 하나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돋보이는 행보를 이어 왔다. 2018년에는 아시아 여성 작가 최초로 독일의 권위 있는 미술상인 볼프강 한 미술상을, 2022년에는 한국인 최초 베네세상을 수상하였다.

콜라주부터 수행적 조각, 전시 공간을 가득 채우는 설치 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를 아우르는 양혜규의 작품은 유사점이 없는 역사나 전통을 독창적인 시각적 언어로 이어낸다. 작가는 블라인드부터 건조대, 한지, 인공 짚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공예 기법과 재료를 사용하여 그에 내재된 문화적 특성을 활용한다. 시각을 넘어 지각을 활성화하는 다감각적이고 몰입적인 환경을 조성하는 양혜규는 이를 통해 노동, 이주 등의 문제를 미학적 관점에서 다루는 몰입형 경험을 제공한다.


양혜규, 〈창고 피스〉, 2004 ©리움미술관

양혜규의 국제적인 인지도를 쌓게 해준 초기작 <창고 피스>는 떠도는 이방인 신분이었던 작가의 초년 모습과 상황을 그대로 반영한다. 2003년 당시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런던에 체류 중이던 작가는 반송되어 보관할 곳이 없었던 작업 모두를 한 곳에 모아 <창고 피스>라는 이름으로 작업을 구성하였다. 목재 운송 팔레트 네 개 위에 13점에 달하는 구작이 운송업체가 포장한 그대로 차곡차곡 쌓여 있는 형태의 이 작품은 영국에서 처음 선보인 후 다름슈타트, 베를린, 상파울로, 암스테르담, 하노버 등에서 전시되었다.

그리고 2004년 <창고 피스>는 독일의 한 컬렉터에게 팔리게 되면서 작가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창고 피스>를 소유하게 된 컬렉터의 권유로 2007년에는 포장되어 있던 다양한 작품들을 풀어 선보이는 “창고 피스 풀기”전을 개최하게 되었고, 이는 그의 작업을 세상에 더욱 알릴 수 있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2008년에는 이불 작가와 함께 독일 ‘카피탈’이 선정한 세계 100대 미디어 설치 작가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양혜규, 〈일련의 다치기 쉬운 배열: 목소리와 바람〉, 2009, 베니스 비엔날레 설치 전경. 사진: Pattara Chanruechachai ©양혜규

양혜규에게 ‘공간’은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그의 대표적인 블라인드 설치 작품인 <일련의 다치기 쉬운 배열> 시리즈는 공간에 대한 작가의 관점이 잘 드러난다. 블라인드는 외부와 대부의 경계를 만드는 용도로 사용되지만, 사실 블라인드로 만들어진 경계는 벽처럼 완벽하게 공간을 나누는 것이 아닌 임시적으로 반투명한 구분을 만들 뿐이다.

작가는 이에 대해 경계가 있되 경계가 아닌 상태는 절대 완전한 전체가 될 수 없다고 설명하며, 그가 설치를 통해 만들어내는 공간이란 완전하지 않은 상태 즉 추상의 개념에서의 공간에 가깝다.

<일련의 다치기 쉬운 배열> 연작 중에서, 2009년 제53회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서 최초 전시된 <일련의 다치기 쉬운 배열: 목소리의 바람>은 세계 유수 미술관인 구겐하임에 영구 소장되었고, 양혜규 작가의 작업 활동을 국제 미술계에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양혜규: 손잡이(Haegue Yang: Handles)” 전시 전경(뉴욕 현대미술관, 2019-2021). 사진: Heidi Bohnenkamp. ©뉴욕 현대미술관

2013년부터 양혜규 작가는 ‘방울’을 중심 소재로 한 <소리 나는 조각> 시리즈를 작업하기 시작한다. 작가는 <소리 나는 조각> 연작에서 외부의 물리적 힘에 의한 움직임이 수반되어야 소리를 내는 방울의 특성을 다양한 형태로 실험한다. 가령, 의류의 형태로 만들어 착용하였을 때 신체의 움직임에 따라 소리를 발생시키거나 바퀴와 손잡이가 달려 있어 이동에 따라 소리가 나는 작업 등이 있다. 이러한 소리를 내는 여러 방식을 통한 시청각적 효과는 관객을 몰입의 경험으로 유도한다.

양혜규는 ‘방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방울은 속이 빈 물체를 흔들거나 두드리며 침묵과 부동의 상태를 소리와 호출로 확장시킨 인류의 보편적 경험”을 일깨우며, “자연에서 문화로의 이행, 공예와 대량 생산으로 치환되는 문화와 산업의 결합을 형용한다.” 즉, 그에게 방울은 소리-설치를 위한 매체에서 나아가 민속과 문명을 반영하는 소재로 기능한다.


“양혜규: 코끼리를 쏘다 象 코끼리를 생각하다” 전시 전경(리움미술관, 2015) ©리움미술관

2015년부터 작가는 ‘민속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짚풀 공예를 전면적으로 도입한 새로운 연작 <중간 유형> 작업을 선보였다. 작가는 민속이 각 문명의 개별성과 특이성을 가지는 동시에 보편성 또한 가진다는 점에 주목한다.

대표적으로 짚을 이용한 수공예는 많은 국가에서 전통적으로 이루어져왔다. 작가는 짚풀이라는 민속적이지만 인류 공통적인 재료 그리고 짚풀 공예라는 방법론을 활용해, 유사함과 상이함을 넘나드는 혼성 문화의 차원에 접근한다.

한편 <중간 유형>에 사용된 재료는 자연 짚이 아닌 인조 짚이다. 이전부터 작가는 자연을 산업적으로 재현한 인공 소재를 사용한 바 있는데, 이로써 값싸고 손쉽게 자연을 모방하고 대체하는 현대 환경을 해학적으로 반영하며 일상적으로 소비되면서 잊혔던 공업적 대체물이 본래 함축하는 유기물, 공예품, 나아가 자연의 기억을 역설적으로 도입한다.

양혜규는 다양한 문화, 종교적 건축물 등을 참조하여 임의적으로 실제 건축물을 축소하고 조립식 알루미늄 구조로 뼈대를 짓고 짚을 엮고 덮어 형태를 빚는다. 이러한 작업은 단지 이질적인 요소들을 섞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닌 틈을 만들어 안으로 들어가 매개하는 ‘중간자’적인 수행이다. <중간 유형>은 이질적 정서와 친근한 감정 사이에 순간적인 충돌을 일으키며, 새로운 혼성적 시간대와 지역대에 대한 인식을 환기시킨다.


“양혜규: 우기청호雨奇晴好” 전시 전경 (울렌스현대미술센터, 베이징, 2015). 사진: Tang Xuan ©양혜규

2006년부터 10년 이상 블라인드 설치작을 주요 작업군으로 발전시켜온 양혜규는 미국의 미니멀리스트이자 현대미술의 거장인 솔 르윗(1928-2007)의 <열린 모듈 입방체(Modular Structures)>를 재해석한 상징적인 작품 <솔 르윗 뒤집기>(2015-)를 작업해오고 있다. <솔 르윗 뒤집기> 연작은 솔 르윗의 원작 조각을 거꾸로 걸되 블라인드의 폭을 일괄적으로 70센티미터로 조정하는 등 미니멀리즘 작가들의 원칙과 같이 작가가 무작위적으로 지정한 기준을 적용해 제작되었다.

양혜규는 솔 르윗의 모듈식 구조를 따라가는 행위를 통해 블라인드라는 재료를 새로운 대상을 창출하는 방식으로만 쓰지 않고, 다른 방식을 고증하는 도구로 재탄생시킨다. 동시에 작가 스스로를 창조 혹은 창작해야 한다는 의무감 혹은 책임감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이미 존재하는 방식의 사고를 고증하고 되새겨보는 방식으로 전환한다.

또한 이 블라인드 조각 연작은 미니멀리즘적 혹은 모노크롬적인 작업 방식을 보편적인 현상이 아닌 서구의 규범적 고전으로만 국한하여 거론해온 미술사에 대한 비판적 논평으로 해석되어 왔다.

“가장 하찮은 잡동사니와 모더니즘 미술의 가장 심원한 테마가 반향과 상호공명의 유희를 통해 확대되는 양혜규의 예술은 진정한 합창 예술이다.” – 니콜라 부리오, <펼침의 경험 ‐ 양혜규와 당대의 조각> 中


양혜규 작가. 사진: 안천호 ©국제갤러리

양혜규는 1994년 독일로 이주 후 프랑크푸르트 국립미술학교 슈테델슐레(Städelschule)에서 마이스터슐러 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모교인 슈테델슐레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며, 2018년에는 아시아 여성 작가 최초로 독일의 권위 있는 미술상인 볼프강 한 미술상을 수상하였다. 헬싱키 미술관(2024), 캔버라 호주국립미술관(2023), 겐트 S.M.A.K.(2023), 상파울루 피나코테카 미술관(2023), 코펜하겐 국립미술관(2022), 테이트 세인트아이브스(2020), 뉴욕 현대미술관(2019) 등 전 세계 유수의 기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한 바 있다.

2009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서 단독으로 전시한 양혜규는 시드니 비엔날레와 리버풀 비엔날레(2018), 제12회 샤르자 비엔날레(2015), 타이베이 비엔날레(2014), 제13회 카셀 도쿠멘타(2012), 광주비엔날레(2010)와 같은 대형 국제전에도 지속적으로 참여해 왔다. 현재 그의 작업은 뉴욕 현대미술관, 구겐하임미술관, 워커아트센터, 런던 테이트 모던, 파리 퐁피두센터 등의 국내외 주요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2024년 가을에는 조각가로 알려진 작가의 평면작업을 조망하는 최초의 전시가 아트 클럽 오브 시카고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이어 10월에는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120점에 달하는 규모의 서베이 전시가 예정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