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한국 현대 조각의 동시대성을 확립하는 데에 주요한 역할을 한 조각가 정서영(b. 1964)은 급격히 변화하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 속에 드러나는 비현실적인 간극을 조각의 요소로 끌어들이며 조각 자체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다뤄왔다. 특히 작가는 산업화된 사회 속에서 발견되는 스티로폼, 플라스틱, 합판, 스펀지와 같은 여러 일상적인 공산품들을 재조합하여 조각적 상태로 전환하는 작업을 해오며 큰 주목을 받아왔다.

현재까지 정서영은 조각뿐 아니라 드로잉, 사운드, 영상,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와 영역에서 유연하게 조각의 문제를 다루는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정서영, 〈유령, 파도, 불〉, 1998 ©정서영

정서영 작가는 일상에서 흔히 발견 가능한 산업 재료들을 가져오되 이를 가공하지 않거나 가공을 최소화한 상태로 본래의 기능적 특성을 살리는 조각 작업을 한다. 가령, 그의 초기작 〈-어〉(1996)는 당시 한국 가정집 등에서 흔히 사용되던 산업 재료인 비닐민속장판을 본래 상태 그대로 가져와 캔버스로써 사용한 작품이다.

장판 위에는 주로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일 때 말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사용하는 음성어 “어”가 궁서체로 써져 있다. 기존 용도에서 벗어난 사물을 새로운 낯선 맥락으로 끌어오는 동시에 “-어”라는 의미적 공백을 시각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사물과 언어의 비규정적이고 열린 가능성으로서의 상태를 드러낸다. 

한편, 〈유령, 파도, 불〉(1996, 1998)의 경우에는 하나의 추상적인 형태가 유령, 파도, 또는 불이 되는 작업이다. 추상적인 형태의 조각을 통해 작가는 다중적이며 비결정적인 언어의 속성을 투영시킨다.

이 추상적인 형태를 관객이 ‘파도’로 인식하는 순간 그 작품은 파도 조각이 되다가도 다시 ‘불’로 인식하는 순간 이는 곧 불 조각으로 변모한다. 정서영은 이처럼 사물과 언어의 지시 관계 또는 낯선 상황을 조각의 형태로 조형화하여 관객에게 이러한 조각적 순간을 직접 경험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정서영, 〈전망대〉, 1999 ©정서영

〈전망대〉는 사물을 새롭게 인식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조형화하는 작가의 작업세계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이다. 해외여행 중인 친구가 보낸 엽서 속 손톱 크기 만한 작은 전망대 이미지를 보고 이를 어떻게 실제 경험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작가의 고민에서 시작된 작품이다.

이를 위해 작가는 나무 합판과 유리를 사용하여 사물과 ‘나’ 사이의 인식적 거리를 조율하고 고민하며 손 안에 있는 크기도 아니고 실제 전망대도 아닌 작가의 신체와 일정한 거리가 생기는 크기의 조각 작품으로 구현해냈다.

정서영, 〈스포츠식 꽃꽂이〉, 1999 ©정서영

정서영은 1990년대 복합매체적이고 개념적인 장소특정적 설치미술이 국제적으로 확산되었을 때, 이처럼 조각적 차원에 몰두하며 사물과 언어와 같이 서로 관련이 없던 요소들이 모여 하나의 조각의 형태를 이루는 조각적 순간을 포착하고 ‘조각’을 보다 폭넓게 확장시키는 조형적 실험을 선보여왔다.

또한 당시 등장한 아트 스페이스 풀 그리고 대안공간 루프와 같은 1세대 대안공간은 한국 미술계에 젊은 예술가들의 동시대적인 예술 실험들을 선보이기 시작했고, 이때 정서영은 두 대안공간 전시에 모두 참여하며 동시대 조각가로서 한국 현대 조각의 동시대성을 견인하는 주요 역할을 하였다.

정서영은 대안공간 풀 개관전 “스며들다”(1999)에서 함석, 알루미늄, 나무 등의 산업 재료를 이용하여 권투 글로브를 꽃꽂이를 해 놓음으로써 낯선 인상을 주는 조형 작품 〈스포츠식 꽃꽂이〉를 선보였다. 일반적인 인식 안에서 쉽게 연결이 되지 않는 낯선 요소들을 중첩시켜 시각화함으로써 우리의 인식에 틈을 만들어내어 새로운 조각적 순간으로 초대한다.


정서영, 〈새로운 삶〉, 2003 ©정서영

정서영은 2003년 제50회 베니스 비엔날레의 한국관 대표 작가로 선정되었다. 이때 작가는 한국관 벽 속에 뒷마당으로 이어지는 숨겨진 출입구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여 그것을 찾아 여는 것에서 출발하는 작업 〈새로운 삶〉을 선보였다. 또한 전시장에 있는 기둥을 가짜 기둥 안으로 감춘 〈새로운 기둥〉과 함께 선보이며 한국관이라는 공간 자체를 작업의 중심으로 끌어들여와 환경 자체를 조각으로 확장시켰다.

정서영, 〈Mr. Kim과 Mr. Lee의 모험〉, 2010 ©정서영

2000년대 작가는 조각적 차원에 대한 작업을 주로 해왔다면, 2010년 LIG 아트홀에서 선보인 퍼포먼스 〈Mr. Kim과 Mr. Lee의 모험〉은 조각의 수행성에 주목한다. 드로잉과 설치작업에서 출발한 이 작업은 9명의 퍼포머와 한 마리의 개가 등장하는데 이들은 공연 두 시간 내내 움직이지 않고 오직 개와 개 주인만 이들 주변을 서성인다.

관객은 헤드셋을 통해 녹음된 사운드를 들으며 극장 안을 배회한다. 이는 작가가 이전부터 탐구해왔던 언어와 사물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는 상황 안에서의 낯섦의 경험, 실재의 빗나감, 체계의 틈새 등을 통해 발생되는 조각적 순간을 퍼포먼스를 통해 새롭게 실험하고 관객을 그 안에 참여시킨 작업이었다. 

정서영은 이처럼 다양한 매체를 통하여 동시대성을 담지하고 있는 일상적인 사물과 언어, 나아가상황 자체를 새로운 조각적 맥락으로 전환하는 작업을 선보여왔다. 그리고 최근 작가는 사물에 내재된 집단 기억에 대한 작업을 해오고 있다. 작가는 그의 개인전 “오늘 본 것”(서울시립미술관, 2022)과 관련하여 진행한 인터뷰에서 그가 몰두해온 ‘조각적 순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하나의 형(形)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생각, 감정, 상황 등의 다양한 요소가 변화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 받다가 불현듯 관계를 맺어 모습이 드러난다. 그 찰나가 바로 ‘조각적 순간’이다.”


정서영 작가 ©바라캇 컨템포러리

서울대학교와 슈투트가르트 미술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한 정서영은 현재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다. 제50회 베니스 비엔날레의 한국관 대표작가로 참여한 정서영은 프랑크푸르트 포르티쿠스, 아트선재센터, 아뜰리에 에르메스, 일민미술관 등에서의 개인전을 비롯해, 제4회 및 7회 광주 비엔날레, 플라토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미디어 시티 비엔날레, 도쿄 시세이도 갤러리, 타이베이 시립미술관, 홍콩 아트센터 등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최근에는 뉴욕 티나킴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또한 김세중 청년조각상,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예술가 지원금 및 예술 재단 지원금을 수상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아트선재센터 등 국내 유수의 국·공립 미술관과 기관에 다수의 작품이 소장되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