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는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 본전시에 참여하고 2019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대표 작가로 참여한 바 있는 남화연 작가의 개인전 “가브리엘”을 오는 2023년 1월 29일까지 개최한다. 전시에는 남화연 작가의 영상 및 설치 신작 4점이 전시되어 있다.
남화연 작가는 움직임과 시간의 관계를 탐구한다.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어떤 사건이나 현상이 남긴 흔적을 가져다 작가만의 상상력을 더해 작품으로 재구축해 왔다. 전작에서는 움직임을 통해 그 시간을 가시화하는 작업을 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오히려 정지한 것처럼 보이는 아주 작은 미동을 조각조각 모아 흐르는 시간이 아닌 조각난 시간으로 표현했다.
“가브리엘”전에서 작가는 특히 징후와 전조, 예감에 주목한다. 작가는 이 추상적인 느낌과 현상을 미카엘, 라파엘과 함께 로마 카톨릭교의 대천사 중 한 명인 가브리엘을 통해서 이야기한다. 가브리엘은 미래에 벌어질 일을 미리 알리는 신의 전령으로 전쟁과 탄생의 소식을 전한다. 그 중 예수의 탄생을 알렸던 ‘수태고지’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작가는 전시에서 말하는 가브리엘이 신적 예언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전시는 오히려 “실체를 알 수 없는, 도래할 사건을 고지하고 예감하는 이미지와 소리들의 집합에 가깝다”.
어두컴컴한 전시장에 들어서면 기묘하게 느껴질 만큼 긴 형태를 가진 관악기들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 뒤로 길게 펼쳐진 검은색 커튼 너머에는 큰 스크린 속 영상의 장면이 비친다. 그리고 전시장에는 거친 사막 위를 가르는 듯한 바람 소리와 금속이 마찰하는 소리로 가득 차 어딘지 황량하면서도 기이한 느낌을 준다.
금속 파이프 악기는 작가가 관악기를 해체하여 긴 형태로 재조합하고 음향을 더한 작품이다. 작가는 해당 작품을 ‘코다’라고 이름 붙였다. ‘코다’는 이탈리아어로 ‘꼬리’를 뜻하며 음악에서 특별히 추가된 종결부를 의미한다. 전에 연주되었던 마디가 다시 반복되고 변주되거나 확장되는 특성이 있다. ‘코다’는 알 수 없는 박자로 부는 바람 소리, 관악기 연습 소리, 금속 파이프 소리가 들리는데, 관람객이 어느 위치에서 듣는지에 따라 소리가 달라지기도 한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모든 소리가 뒤섞이는 소용돌이(vortex) 같은 시간의 운동을 상상한다. 전시에 입장할 때와 퇴장할 때 관람객들이 ‘코다’를 마주하게 된다. 그 동선이 마치 음악의 코다와 연결된다는 점도 유념해 볼 만하다.
검정색 커튼 안쪽 공간에 들어서면 20분 길이의 영상 작업이 눈에 들어온다. 전시 제목과 같은 제목을 가진 ‘가브리엘’은 영상과 주변 설치물로 구성된 작품이다. 커다란 스크린 화면에 재생되는 영상과 함께 양 옆에는 바람 소리가 나는 스피커가 부착된 금속 기둥들이 설치되어 있다.
영상 작업은 어떠한 서사를 지니지 않는다. 다만, 실체를 알 수 없는 미래를 예고 받을 때의 두려움과 경이로움을 표현한다. 화면에는 르네상스 시대 보티첼리, 로베르 캉팽,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과 같은 옛 대가들의 회화 작품 이미지, 화상 탐사 로버의 촬영본, 타원형 스타디움의 기둥 장면 등 서로 연관이 없어 보이는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바람 소리는 영상과 함께 어떤 경외감을 끌어올린다.
회화 이미지는 옛 화가들이 상상하여 그린 수태고지의 일부 장면에서 가져왔다. 여기에는 성모 마리아의 순결을 상징하는 백합, 성령의 빛 줄기, 천사의 날개, 촛불 연기가 담겨 있다. 그러다 뜬금없이 탐사 로버 ‘퍼시비어런스(Perseverance)’가 담은 화성의 장면들도 등장한다. 생명체의 흔적을 찾아 담은 화성의 이미지는 언제, 어떻게 도래할지 모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시공간을 제시한다.
스크린의 뒤편에는 ‘새로운 사원’(2022)이라는 작품이 놓여 있다. 마치 유물이 발굴된 현장처럼 흰 천 위에 유토로 만든 소형 조각들이 놓여 있다. 작가는 최첨단 항공 매핑 기술 ‘라이다(LIDAR)’를 통해 과테말라 밀림에서 사라진 마야 문명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 작품을 만들었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과거가 항공 매핑 기술을 통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작가는 이러한 과정이 마치 어떠한 전조 현상과 비슷하다고 느낀다.
‘창문-꿈'(2022)은 부식된 백동판의 모습을 구현한 드로잉 작업이다. 수태고지를 배경으로 하는 회화 작품에서 창문은 인간과 신을 연결해 주는 통로를 상징한다. 작가는 오늘날 이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창을 상상한다. 작가는 우리를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려 있는 인터넷 세계와 연결해 주는 컴퓨터화면과 같은 디바이스 창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남화연(b. 1979) 작가는 아르코미술관(서울, 2015), 쿤스트할 오르후스(오르후스, 2019) 등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그는 특히 2012년부터 10년 간 무용가 최승희(1911-1969)에 관한 연구를 바탕으로 작업해 온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일제 식민지 기간에 한국 무용가로서의 주체성에 대한 고민과 시대적 갈등을 안무에 담은 최승희 무용가에 대한 자료는 그가 월북한 이후로는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이와 관련한 작업은 페스티벌 봄(2012), 제58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2019), “마음의 흐름”(아트선재센터, 서울, 2020), “Performance/Documentation/Presentation”(룬드 미술관, 룬드, 2020) 등에서 전시 및 공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