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정현(b. 1956)은 반구상적인 실존적 인간상을 조각하거나 조각의 범주에서 통용되지 않던 재료들을 조각화하여 재료의 물질성을 드러내는 작업으로 한국 현대 조각사에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해 왔다. 작가는 프랑스 유학을 계기로 1980년대부터 사실적으로 ‘잘 만들어진’ 조각의 제작이 아닌 조각을 만들며 작가 자신의 감성이 함께 맞물려지는 ‘심리적인 조각’을 만듦으로써 ‘인간의 정신성과 실존의 에너지’를 담아내려 노력해 왔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에는 그동안 습관화된 것들을 벗겨내는 작업의 일환으로 실존적 인간상을 제작했다. 나아가 작가는 기존의 아카데믹한 방법론을 거부하고 자신의 감성과 어우러지는 재료와 도구들을 찾아 나섰다.

2000년대에 들어 전통적이지 않은 재료들, 주로 철 조각이나 침목, 타르, 파쇄공과 같은 산업 부산물을 재료로 사용하여 재료 자체가 지닌 시간의 축적과 아름다움, 그리고 생명력을 강조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Chung Hyun, Untitled, 1989 ©Chung Hyun

정현은 1986년 홍익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로 유학길에 올랐다. 프랑스 유학은 한국에서 조각을 공부하던 시절부터 작가에게 습득되어 온 조각의 사실성이 벗겨지기 시작한 계기가 된다.

작가는 사실적으로 잘 만들어진 조각상이 아니라 그 안에 자신의 감정과 같은 내면의 표현을 담아내는 것을 목표로, 그간 학습하고 습관화했던 모든 아카데믹한 것들을 벗겨내는 작업을 마치 수련하듯 거듭해 왔다. 이를 위해 정현은 전통적인 조각 도구인 헤라를 버리고 자신의 감성에 와닿는 도구로써 각목이나 삽을 사용하여 흙덩어리를 치거나 잘라내어 형상을 만들었다.

정현은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기존의 습관들을 벗겨내듯 재료의 살점을 한 겹씩 뜯어내어 뼈만 남은 듯한 ‘선조’ 작업을 착수했다. 인체의 구체적인 형태는 생략하고 앙상한 뼈대와 근육만을 남기는 이러한 반구상적인 작업은 무언가를 정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 본질에 가까이 다가가 실존의 에너지를 표현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그로 인해 결과물은 언제나 일정하지 않으며 불규칙한 상태로 마무리된다. 정현의 조각은 완결된 것이 아닌 미완성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작가의 내면과 연결된다. 작가 자신의 생각 또한 완전히 정리될 수 없으며 언제나 갈등과 헤맴의 상태에 있기 때문이며 그렇기에 미완의 상태일수록 더욱 작가의 내면과 맞닿아 존재 자체로서의 생동감과 생명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Chung Hyun, The Standing Man, 2001-2021 ©Gyeonggi Museum of Modern Art

전후 1960년대 유년 시절을 보낸 작가는 군수 물품을 실은 화물열차가 다니는 철길을 오가며 자랐다. 이러한 경험은 이후 그가 30대가 되었을 때 처음 ‘침목’을 발견하며 이를 오브제로 사용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침목은 철길 제일 밑 부분에서 열차의 엄청난 무게를 견디며 레일을 지지하는 역할을 하는 나무로, 쓸모를 다 한 침목 표면에는 그러한 인고의 세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불규칙한 흠집과 같은 상처들이 가득하다. 작가는 이러한 침목이 견뎌 온 시련의 역사를 한국인이 겪어 온 험난한 현대사와 겹쳐 보며 이 자체로 하나의 예술이라 여겼다.

정현은 도끼를 이용해 단단한 침목의 표면을 찍어 깎는 작업을 해오다가 침목의 질감 그대로를 존중하여 드러내는 방법으로 전환한다. 이에, 최대한 가공하지 않은 침목을 이용하여 단순한 구조로 서 있는 인간의 형태를 만드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후에는 인체 형상 가운데에 스테인리스나 알루미늄을 추가하여 시련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이겨내는 인간의 정신력을 부각시키는 작업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Chung Hyun, Untitled, 2014 ©Hakgojae Gallery

침목과 같이 오랜 세월 인고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또 다른 재료로 정현이 주목한 것은 ‘파쇄공’이었다. 파쇄공은 철을 만드는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을 작은 크기로 깨부수는 역할을 하는 육중한 크기의 쇳덩어리다.

수년간 부수는 작업을 해오면 파쇄공의 몸은 이곳저곳 찍히고 깎이며 닳게 된다. 그 표면에는 자기 몸을 깎아내며 견뎌온 그간의 시련이 지표처럼 남게 되는 것이다. 작가는 수명을 다한 파쇄공을 가져와 야외에 놓고 날씨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표면을 관찰하고 녹이 슬면 왁스 칠을 하는 작업을 반복한다.

정현은 이와 더불어 폐철근, 목전주, 산불로 타버린 나무토막 등 전통적인 조각 재료가 아닌 시련의 흔적을 몸소 품고 있는 폐기물을 발견하고 그들의 역사에서 우러나오는 고유한 아름다움에 주목하는 동시에 묵묵히 사회를 지탱해 온 모든 보통의 삶들을 투영하여 바라본다.

Chung Hyun, Untitled, 2014 ©SeMA

정현은 입체 작업뿐 아니라 드로잉을 통해서도 그의 주제 의식을 드러내 왔다. 그에게 드로잉은 조각 제작을 위한 에스키스(습작)가 아니라 이 또한 조각과 마찬가지로 당시 작가의 내면의 감성을 표현하기 위한 매체이다. 정현은 “드로잉은 내 몸 어딘가에 응축된 감정을 툭 던져놓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조각에서 재료가 가진 고유한 물질성과 역사를 강조하였듯, 드로잉 또한 이미지의 형태보다는 재료의 존재감을 전달한다.

정현은 폐기된 X-ray용 필름을 수집해 그 위에 콜타르(석유 찌꺼기)로 그림을 그리거나 흰 철판에 의도적으로 흠집을 낸 후 비 오는 날 야외에 두어 녹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흔적을 만들어내는 등 작가의 개입보다 재료 자체가 가진 성질을 드러내는 드로잉을 선보여왔다.


Installation view of “Mass” ©SeMA

정현은 올해 3월 막을 내린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에서의 개인전 “덩어리”에서는 재료와 재료의 부딪힘에서부터 시작한 신작 〈점유하는 돌〉을 선보였다. 여수 장도에 위치한 레지던시에 초청받아 약 3개월의 시간을 보낸 정현은 그곳에서 작업 구상보다는 걷기를 통해 잡념을 비워내며 몸의 감각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졌다.

〈점유하는 돌〉은 그때 걸으며 발에 치인 돌들을 하나씩 작업실로 수집해 온 것에서 시작되었다. 작가가 수집한 돌들은 섬에서 발견된 위치에 따라 파도에 심하게 마모된 돌과 거친 질감이 그대로 살아있는 돌로 구분된다. 작가는 이 돌들을 모두 3D 스캐닝 기술을 통해 확대하거나 축소하여 변형하고, 돌들이 지닌 세월의 흔적과 서로 다른 질감의 낯선 충돌을 새로운 기술로 부각했다.

정현은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하찮은 것들의 하찮지 않음’을 향하는 꾸준한 관찰자로서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작가는 이미 다 소진된 폐기물에서 산업화와 도시화의 사회적, 시대적 고난을 버텨내며 묵묵히 사회를 지탱해 온 보통의 삶들을 발견한다. 정현은 그러한 삶들이 겪어 온 시련의 세월과 생명력을 작가의 방식으로 조명하고 제시함으로써, 소모되는 시간을 충실히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실존적인 모습으로 빗대어 바라보게 한다.

“나는 작업을 창자로, 내장으로 하는 사람이다. 머리로, 가슴으로, 손으로 작업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내가 흡수한 것이 안에서 숙성되고 소화될 때 작품이 뛰쳐나오는 것 같다.”

Artist Chung Hyun ©Seongbuk Museum of Art

정현은 홍익대학교 및 동대학원 조소과를 졸업하고 1986년 프랑스 파리국립고등미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이후 1992년 원화랑에서의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2023-2024), 성북구립미술관(2022), 금호미술관(2018) 등 국내 유수 기관을 비롯하여 파리, 뉴욕, 도쿄에서 20여 회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또한 2006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과 2009년 한국미술평론가협회상 창작부문 대상, 2004년 김종영미술관 오늘의 작가 등에 선정된 바 있으며, 한불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 대표 작가로서 프랑스 파리 왕궁 정원과 생-클루 국립 공원에서 전시하였다. 국립현대미술관과 경기도미술관을 비롯한 국내외 주요 미술관과 갤러리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