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안규철(b. 1955)은 1980년대부터 중반부터 삶과 예술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동시대 미술의 대안적 가능성을 일관되게 추구해 왔다. 안규철은 삶과 세계를 성찰하는 작업에 집중하면서 일상과 사물 그리고 언어를 섬세하게 관찰하며 매체와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복합적인 형태의 작품세계를 구축해 왔다. 작가 고유의 개념적 사고와 현실의 우회적 재현에 바탕을 둔 그의 작업은 우리가 잊고 있던 사물과 인간의 본질을 사유하고 더 나아가 세계의 부조리와 모순을 대면할 수 있도록 이끈다.

Ahn Kyuchul, Scenery of Jeong-dong, 1985 ©MMCA

안규철은 사물의 개념적인 성격에 몰입하는 작업으로 유명하지만, 그가 작업을 시작했을 무렵인80년대 초중반에는 당시 한국 사회에 대한 현실을 반영하는 작품들을 제작하곤 했다. 1972년 10월 유신이 단행된 무렵 대학에 입학한 안규철은 억압되고 위축된 분위기 속에서 대학생활을 보냈다.

그리고 당시 학교 내에서는 아카데믹하지 않은 미술은 인정되지 않는 보수적인 분위기였다. 작가는 이러한 환경 속에서 기성 미술계와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을 자연스레 키우게 되었고, 이후 한국의 사회정치적 현실을 예술에 반영하고자 하는 평론가와 예술가로 구성된 ‘현실과 발언’ 그룹의 일원으로 참여하게 된다.

정치적 격동기였던 한국의 1980년대에 작가는 자신의 집 베란다에서 현실의 사건들을 아주 소박한 재료로 재현하는 미니어처 작업을 제작했다. 〈정동풍경〉(1985)은 작가가 매일 지나다니던 덕수궁 돌담길에서 목격한 시위를 하기 위해 경비를 뚫고 미국 깃발이 걸려 있는 건물에 담장을 넘어가는 대학생들의 모습을 미니어처 조각으로 재현한 작품이다.

안규철은 이와 같은 당시 정치적 그늘 안에서 일어난 현실의 사건들을 마치 동화처럼 작은 조각으로 표현하는 풍자적인 일련의 작품들을 선보였다.

Ahn Kyuchul, Unrighteous Brush, 1992 ©MMCA

안규철은 1980년대 중반 미술계의 관행에 이의를 제기하고 사회의 당면 문제를 드러내는 “이야기가 있는 조각”으로서의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의 작업은 사물과 조각의 경계에 위치한 오브제를 만들고 거기에 사변적인 언어를 덧붙임으로써 일상적 사물에 대한 습관화된 개념을 전복시키는 것으로 전개된다.

작가가 독일에서 유학하던 시기 개최한 개인전에 출품한 〈죄 많은 솔〉(1992)은 안규철 작업의 지속적 테마라고 할 수 있는 사물들에 대한 기존의 상식적인 개념을 뒤집음으로써 보이지 않는 이면의 질서와 모순을 드러내는 작품 중 하나이다.

작가가 직접 만든 일상적 오브제인 솔의 털에 “죄”라는 글자를 새겨 넣음으로써 먼지와 더러운 것을 터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솔의 용도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작품으로, 일상의 사물을 통해 세상에 존재하는 상식의 폭력과 부조리를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Ahn Kyuchul, The Man’s Suitcase, 1993 ©Kukje Gallery

1990년대, 독일 유학 생활을 기점으로 작가는 드로잉과 텍스트를 하나의 작품으로 서로 맞물리게 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당시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말로 설명하고 질문하는 독일 학교의 크리틱 수업 방식을 처음 접했고, 이는 한국의 기성 미술계 안에서 공부했던 작가에게 기존의 틀을 부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그는 아이디어 스케치를 할 때 이와 관련된 생각을 글로 함께 적음으로써 글과 그림이 하나의 작품으로서 연결될 수 있는 방식으로 작업해오게 된다.


Ahn Kyuchul, The Man’s Suitcase, 1993 ©Kukje Gallery

가령, 스케치와 그에 상응하는 텍스트로 이루어진 11장의 드로잉과 날개 모양 가방 조각으로 구성된 설치작품 〈그 남자의 가방〉(1993)은 텍스트를 이용하여 허구적 서사를 오브제에 연결시키는 실험적인 작업이었다.

이는 안규철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허구와 실재’라는 주제의식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작이기도 하다. 미지의 남자가 맡기고 간 날개 모양의 가방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11점의 드로잉 옆에는 이야기 속 중심 소재인 날개 모양의 가방이 마치 이 이야기의 구체적인 물증으로 제시된 것처럼 관객 앞에 놓이게 된다.

관객은 이 구체적인 물증을 앞에 두고, 그 허구적 이야기를 믿어야 할지를 고민하게 된다. 안규철은 이 작업을 통하여 실재와 허구는 그물망처럼 서로 엮어져 있으며 결코 분리할 수 없음을 이야기하고, 관객은 그 엮임의 순간을 경험하며 우리의 시각문화와 기호가 가지는 이중적인 의미망을 지각하게 된다


Ahn Kyuchul, Room With 112 Doors, 2004 ©The Hankyoreh

이후 안규철의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 활동은 건축, 즉 공간의 영역으로 확장된다. 2004년 로댕갤러리에서의 개인전 “49개의 방”에서 선보인 〈112개의 문이 있는 방〉은 그러한 건축적 작업의 첫 발걸음으로 여겨진다.

작가는 우리 사회와 관련된 보편적인 이야기를 전시장이라는 공간 안에서 어떻게 풀어나갈지에 대한 질문을 시작으로, ‘현실’에서 우리가 마주하고 여닫는 문을 제작했다. 이 112개의 문들을 모두 열고 들어가도 같은 방이 반복되어 문을 여는 행위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동어반복의 경험을 제공하는 동시에 사방이 문인 작은 공간 안에서 언제 누군가가 들이닥칠지도 모른다는 열림과 폐쇄의 경계에 선 경험을 제공한다.

작가는 이러한 미로와 같은 공간을 통해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하지만 어제와 다를 바 없는 반복적이고 권태로운 현대인의 일상과 현대사회에서의 타인과 나 사이의 경계에 대한 이야기를 관객이 직접 몸소 체험하는 방식으로써 전달한다.  

그리고 작가는 공간과 주거 환경에 대한 건축적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왔는데, 예를 들어 재건축으로 인해 쓸모 없어진 자재를 가져오거나 폐가에서 주운 문짝을 가져와 집을 짓는 등 우리 사회의 현실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사물들을 미술 작품으로 재맥락화하는 작업을 선보이기도 했다.


Ahn Kyuchul, 1,000 Scribes, 2015 ©MMCA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 시리즈에 선정된 안규철은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전을 개최하며 다양한 예술 장르를 서로 엮어 하나의 작품으로 관객에게 제시하며 삶에 대한 성찰을 유도했던 그의 기존 작업을 전시 전체로 확장했다.

‘각각의 작품들이 하나의 시퀀스가 되어 문학 작품처럼 기승전결과 같은 이야기처럼 기능하면 어떨까?’라는 작가의 생각을 바탕으로 기획된 이 전시는 문학, 건축, 음악, 영상, 퍼포먼스, 그리고 출판을 포괄하는 장르 융합적인 작업들이 관객과 만나며 서로 얽히도록 구성되었다. 전시 제목은 마종기 시인의 시에서 인용된 것으로, ‘지금-여기’에 부재하는 것들의 빈 자리를 드러내고 그것들의 의미를 되새기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그리고 작가는 개념적이고 복잡한 방식이 아닌 누구나 예술 작품의 창작에 부분적으로 참여 가능한 방식으로 풀어내어 쉽게 전시의 의도를 오감을 통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했다. 가령, 〈1,000명의 책〉은 전시 기간 동안 1천여 명의 관객들이 문학작품을 한 시간동안 필사하도록 하는 작업이었고 〈기억의 벽〉은 관객들이 써낸 메모지가 모여서 거대한 벽을 이루는 관객 참여형 작업이었다.

이처럼 안규철은 그의 작업에 관객을 초대하여 우리 주변에 넘쳐나는 이미지의 감각적인 자극을 넘어 그 뒤에 가려져 있는 ‘보이지 않는’ 생각들을 다 함께 들춰내고 연결함으로써 연대와 공감의 공동체를 이루고자 하였다.

“나는 주변의 사물과 텍스트를 가지고 사소하고 어이없는 농담을 하는 데 관심이 있다. 나는 사람들이 몰두하는 중요한 일들에 무관심하거나 이러한 현실의 위중함을 몰라서가 아니라, 거꾸로 우리의 삶을 그렇게 생존과 추락의 갈림길로 내모는 이 압도적 현실에 순순히 투항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심각한 미술에 반대하지 않고 감각적인 구경거리로서의 미술에 반대하지 않으나, 그것들이 과연 우리 삶의 다른 가능성들에 대한 생각을 확장하고 있는지 의심한다. 나는 전형적이고 예측 가능한 반응과 해법에 안주하는 예술에 반대한다.” (안규철,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 워크룸프레스, 2014, p. 331)


Artist Ahn Kyuchul ©Kukje Gallery

안규철은 1977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했다. 1980년부터 1987년까지 『계간미술』 기자로 활동하면서 1985년 ‘현실과 발언’에 참여했다. 1987년 프랑스 파리로 유학 후 1988년 독일로 이주, 슈투트가르트 국립미술학교에 입학해 1995년 동 대학 학부 및 연구과정을 졸업했다. 1997년부터 2020년까지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로 재직했다.

주요 개인전으로는 국제갤러리에서의 “당신만을 위한 말”(2017),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2015),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하이트컬렉션, 2014), “49개의 방”(삼성미술관 로댕갤러리, 2004)이 있다.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린 “달의 변주곡”(2014), 제9회 광주비엔날레 “라운드 테이블”(2012), 삼성미술관 리움 “한국미술-여백의 발견”(2007), 독일 프랑크푸르트 쿤스트페어라인 (Kunstverein)에서 개최한 “Parallel Life”(2005)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가한 바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