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홍승혜(b. 1959)는 회화,
콜라주, 설치, 조형, 그래픽,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매체를 실험해오며 자신의 예술세계를
확장시켜 왔다. 특히, 컴퓨터 화면의 기본 단위인 사각 픽셀을
조합, 분해, 반복하여 유기적이고 역동적인 이미지를 증식시킨다. 모니터에서 탄생한 이러한 이미지들은 점차 실재의 공간으로 나와 평면, 입체, 애니메이션, 가구, 건축으로
확장되며 조형적 변화를 거듭한다.
이렇듯 공간의 구축으로서의 추상에 대한 일관된 관심을 바탕으로 작가는 작품의 내적 구조와 작품이 위치할 건축
공간과의 관계를 탐색하며 기하학적 추상이 실천된 현실-장소를 만들어낸다.
홍승혜는 프랑스 유학시절
앵포르멜 작가인 올리비아 드브레(Olivier Debré) 밑에서 수학하며, 외부 세계를 재현하는 것보다 회화를 이루는 물리적 조건들이나 지점들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90년대 초반에는 캔버스를 완전히 해체하여 물리적 지지대로
사용하던 그룹인 ‘쉬포르 쉬르파스(Support-Surface)’에
영향을 받은 작가는, 종이를 이용한 콜라주 작업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종이를 잘라내고 구기는 등
자유자재로 화폭을 주무르는 콜라주 작업에서 시작하여, 1995년 국제갤러리에서의 개인전에서는 종이를
자르는 틀인 레디메이드 금형을 빌려 하드보드지를 절단하고 채색한 뒤 콜라주 하는 작업들을 선보였다.
“유기적 기하학” 전시 전경 ©국제갤러리
1997년, 모든 정보가 전산화되던 시기 작가는 컴퓨터를 이용한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기본 프로그램인 그림판을 사용하여 도형을 만드는 작업을 하다가, 패턴을 제작하고자 포토샵 프로그램을 사용했다. 작가에게 있어 모니터
화면은 거대한 자연계와 같았다. 픽셀이 모여 형태를 이루는 과정은 마치 자연계에서 생명체가 싹이 돋고
성장하는 것과 유사하다.
〈유기적 기하학〉 시리즈도 픽셀을 하나의 세포로 보는 이러한 관점에서 출발했다. 홍승혜는 1997년 국제갤러리에서의 개인전 “유기적 기하학”을 시작으로 컴퓨터 픽셀의 구축을 기반으로 한 실재 공간 운영에 깊은 관심을 보여 왔다.
작가는 ‘액자 안 도형이 그 바깥으로 나오면 어떨까?’라는 생각에서 출발하여 알루미늄 패널을 이용한 부조 형식의 셰이프드 캔버스(shaped
canvas)를 제작하여 도형이 하나의 몸체가 되어 벽에 부착되는 부조 작업을 선보이거나, 타일을
픽셀의 연장으로 보고 도형이 전사된 타일을 벽이나 바닥 등에 부착하여 공간적으로 확장시킨 작업들을 선보였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 자체를 ‘유기적 기하학’이라고 설명한다. 사실 제목을 구성하는 단어들인 ‘유기적’과 ‘기하학’은 서로 이율배반적이다. ‘유기적’은
자연적이고 불확실성을 가지지만 ‘기하학’은 기계적이고 절대적
안정성을 가진다. 홍승혜는 이러한 모순의 양 극단을 포용하는 과정에서 마주하게 되는 예기치 못한 조건들을
자신만의 ‘이상향’을 구축하는 규칙으로 삼는 데서 비로소
예술적 의의를 찾는다고 설명한다.
홍승혜는 기존 도형 작업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마치 아메바처럼 잘라도 다시 형태가 살아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이때 시작된 작업인 〈파편〉(2008)은 이미 완성되었다고 생각한 이미지들이 분해될 때 예기치 못한 형태가 만들어지게
되고 그렇게 생성된 형태가 또 다른 새로운 형태를 만드는 출발점이 된다는 작가의 관점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과거에 제작한 알루미늄 패널 작업 일부를 가늘게
잘라 다시 알루미늄 파이프의 한 면에 재연하여 실제 자재처럼 전시한다. 완성된 작업이 다시 작업을 위한
자재로 변모하고 여러 방식에 따라 무한히 재조합됨으로써 새롭게 전시되는 유기적인 작업 방식이다. 가령, 결과물이 고정적이지 않음을 표현하기 위해 과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의 소장전에서 〈파편〉 작업을 매번 다르게 설치하여 전시하기도 하였다.
“광장사각 廣場四角(Square Square)” 전시 전경 ©아뜰리에 에르메스
이후 홍승혜는 자신의 작업을 보다 공간적인 영역으로 확장시키는 작업을 선보였다. 2003년에는 건축가 마리오 보타(Mario Botta)가 설계한
강남 교보타워 로비에 〈유기적
기하학〉을 공공 설치 미술의 형태로 전시했다. 작가는 건물의 조형적 맥락을 우선 고려하여 대칭 구조의 건물에 맞추어 그의 작업 또한 대칭의 형태로 설치함으로써
공간과의 조화를 꾀했다.
그리고 작가는 2012년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의 개인전 “광장사각 廣場四角(Square Square)”에서도 건물 자체의 조형적
특성을 고려하여 전시장 자체를 하나의 광장으로 변모시켰다. 홍승혜는 아뜰리에 에르메스 건물의 큐브형
구조를 보며 ‘광장사각(Square Square)’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Square’는 사각형이라는 뜻이기도 한 동시에 광장을 의미하는데, 작가는 여기서 광장보다는 사각형이라는 뜻에 더 초점을 맞췄다. 이에
작가는 사람들이 앉아 쉴 수 있는 작품을 두거나 바닥을 보도블럭처럼 만들어 건너갈 수 있도록 하는 등 ‘광장을
구성하는 요소로서의 사각형’ 또는 ‘광장으로서의 사각형’이라는 의미를 관객의 일상적 움직임과 조응할 수 있는 형태로 풀어냈다.
나아가 홍승혜는 그의 도형 작업을 애니메이션의 형태로 발전시켜 ‘춤추는
기하학’ 시리즈를 작업하기 시작했다. 도형에 움직임이라는
요소를 넣을 때 음악이 필수적인 요소임을 발견한 작가는 본인이 평소 듣는 음악 중 꽂히는 음악을 골라 이 음악에 맞춰 도형을 춤추게 했다. 홍승혜가 고른 곡들은 우연하게도 단조의 슬픈 곡조였고, 이에 착안하여
작품 제목을 ‘더 센티멘탈’로 명명했다.
총 9개의 작업으로 구성된 〈더 센티멘탈〉 시리즈는 기존에 존재하는 음악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면, 이후에는 애플의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인 개러지 밴드를 이용해 작가가 직접 작곡한 음악에 맞춰 춤추는 기하학을
제작했다. 홍승혜는 2016년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서의 개인전
“나의 개러지 밴드”에서 포토샵으로 만들어진 인물 픽토그램으로
결성된 밴드가 작가가 만든 음원에 맞춰 플래시 애니메이션으로 움직이는 일종의 영상 쇼를 선보였다.
이처럼 홍승혜의 유기적인 기하학은 끊임없는 매체 실험을 거쳐 계속해서 조합되고 분해되며 증식된다. 작년 국제갤러리 개인전에서는 전시를 계기로 새로이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를 습득해 연습 과정을 작품화한 신작을
선보이기도 했다. 홍승혜의 그리드를 바탕으로 시작된 작업은 이제 픽셀이라는 틀을 벗어나 자유롭게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만들어졌다가 사라지고, 다시 새로 조합되는 유기적인 과정을 거친다. 나아가 작가는 액자 안을 넘어 우리의 현실에 개입하는 작업을 지속해오고 있다.
“예술이 삶을 예술보다 더 흥미롭게 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작가로서 그 역할을 하고 싶다.” (국립현대미술관, MMCA 작가와의 대화 | 홍승혜 작가, 2021)
홍승혜 작가 ©국제갤러리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난 홍승혜는 1982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한 후 프랑스로 건너가 1986년 파리 국립미술학교를 졸업했다. 1986년부터 현재까지 국제갤러리, 아뜰리에 에르메스,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을 비롯하여 30여 회의 개인전을 선보였다.
단체전으로는 광주, 부산, 서울 미디어시티 등 국내 주요 비엔날레를 포함,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일민미술관
및 프랑스 파리 한국문화원, 이탈리아 볼로냐 현대미술관 등 다수의 국내외 주요 기관 전시에 참여했다. 주요 작품 소장처로는 한국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리움미술관, 성곡미술관, 아트선재센터
등이 있으며 1997년 토탈 미술상, 2007년 이중섭 미술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