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풍경 회화 작품으로 잘 알려진 이기봉(b. 1957)은 1980년대부터 설치와 평면회화를 중심으로 심도 깊은 작업들을 선보여 온 한국의 대표적인 중견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는 주로 인간과 사물, 세계의 본질을 이루는 구조와 흐름, 그리고 그것이 파생하는 다양한 의미들에 관심을 가져왔다.

작가는 작업 초반에는 외부적인 사건들이나 현상들에 관심을 가지며 물질실험과 형식실험에 몰두했다면, 그 이후로는 자연을 주제로 세계의 본질을 탐구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그의 작업은 시각과 지각을 통해, 철학적 그리고 과학적 사색을 불러일으킨다.


이기봉, 〈There is No Place: The Sleep Machine〉, 2003 ©국제갤러리

작업 초반인 1980년대에는 작가로서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는 추상 경향의 회화를, 1990년대에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다루는 설치 작업 등을 선보였다. 그리고 이후 작가는 물, 안개, 먼지 등의 속성에 주목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존재의 본질과 정신에 대한 탐구를 계속해 왔다.

2003년 선보인 인터랙티브 설치 작업인 〈There is No Place: The Sleep Machine〉은 물의 특성에 대한 탐구를 바탕으로 제작된 관객의 신체적 반응을 유도하는 작업이다. 가는 선을 따라 흐르는 붉은 물방울과 기계의 백색소음은 관객의 시청각을 자극한다. 일정한 소음을 들으며 흐르는 물의 속도를 따라가다 보면 졸음을 유발하기도 한다.


이기봉, 〈End of the End〉, 2008 ©국제갤러리

그리고 이기봉은 안개나 물에 대해 평상시 드러나지 않았던 사물의 정신을 일깨우고 인간의 의식 속에 감춰진 판타지를 불러일으키는 요소로 보았다. 예를 들어, 그를 다양한 국제 미술 무대로 이끈 대표작 중 하나인 〈End of the End〉(2008)는 책을 읽는 행위를 통한 감성과 상상세계를 물을 매체로 하여 시각적 은유로 표현한 설치 작품이다.

작가가 당시에 읽던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를 플라스틱 책으로 만들어 푸른 수조 안에서 물의 흐름에 따라 자유롭게 유영하도록 함으로써 인간의 감성적인 나르시시즘을 표현한다.

이기봉, 〈젖은 정신〉, 2008 ©MMCA

물과 안개의 속성에 기반하여 인식의 문제에 접근하는 작가의 경향을 보여주는 또 다른 대표작인 〈젖은 정신〉(2008)은 안개가 자욱한 배경에 두 그루의 나무가 서 있는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회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언뜻 사진처럼 보일 정도로 사실적인 공간감을 표현한다. 이는 캔버스 위에 0.5cm의 간격을 두고 겹쳐진 플렉시글라스(Plexiglas)가 만들어 내는 효과로, 이를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반투명한 ‘막’ 뒤편의 안개가 피어 있는 듯한 화면 너머를 들여다보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인간이 저마다의 프레임을 통해 세상을 경험하는 일상적인 행위와 일맥상통한다.

이기봉, 〈There is No Place - Shallow Cuts〉, 2008 ©국제갤러리

〈There is No Place - Shallow Cuts〉(2008)은 물 안개를 수증기로 구현하여 공간을 에워싸는 대형 설치 작업이다. 이 작품 또한 관객의 신체와 작품 사이에 막이 존재하여 분명한 거리감을 형성한다. 그리고 수증기가 서서히 공간을 채우면서 나무의 형태는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함으로써 관객이 안개와 같은 수증기와 유리막 너머의 나무 형상을 응시하도록 유도한다. 이는 전시장의 일부를 채우는 대형 규모로 대상의 안 쪽을 응시하는 경험을 보다 신체 전반을 통한 감각 경험으로 확장시킨다.


이기봉, 〈Where You Stand Green-1〉, 2022 ©국제갤러리

이처럼 회화와 설치를 넘나들며 세계의 본질을 이루는 구조 및 흐름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실험해온 이기봉은, 2022년 국제갤러리에서의 10년만에 개최한 개인전을 통해 자연의 순환과 사라짐에 대한 사색을 담은 ‘바니타스(vanitas)’ 시리즈를 선보였다.
〈Where You Stand Green-1〉(2022)은 작가가 그간 꾸준히 작업해온 안개 속의 몽환적인 물가 풍경을 담고 있다. 〈젖은 정신〉(2008)과 마찬가지로, 캔버스 위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얇은 아크릴 판 또는 폴리에스테르 섬유를 겹쳐 올려 두 개의 이미지를 덧댐으로써, 재현의 대상을 나무나 호수가 아닌 ‘물안개’로 삼는다.

작가는 제목인 ‘Where You Stand’, 즉 ‘당신이 서 있는 곳’이 곧 세계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곳에 서서 도달할 수 없는 저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우리의 삶이며, 그 사이에 존재하는 환영(환상)을 끄집어내어 환기시키는 것이 작가의 역할이라 설명한다. 그림과 그 위에 물안개와 같은 ‘막’을 둠으로써 만들어진 시각적 환영은 이러한 세계의 메커니즘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Where You Stand” 전시 전경 ©국제갤러리

또한 이기봉은 앞선 몽환적 풍경 속의 섬세하고 디테일한 표현과는 대비되는, 거친 표면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에서 발췌한 텍스트가 깔려 있는 새로운 텍스트 작업을 선보였다.
이전 작업에서도 다루었던 이 텍스트는 인간은 세계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고 언어나 감각이라는 ‘막’을 통해서만 어렴풋이 인식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작가는 캔버스 뒷면으로부터 밀어낸 듯한 모양새로 쌓아 올린 비트겐슈타인의 텍스트를 모호한 형체의 풍경 뒤에 숨게 하여, 또 다른 형태의 막으로 기능하도록 함으로써 우리를 둘러싼 불확정성을 드러낸다.

작가는 이처럼 인간이란 결국 자신에게 비쳐지는 세상을 인식하는 존재라 인지하며, 자신이 변주하여 자각하는 과정의 메커니즘을 시각화 하는 데 주력해왔다. 도달할 수 없는 실재와 현실 사이의 간극을 예술로써 드러내며 관객으로 하여금 사물의 다른 측면, 나아가 세계에 여러 층위를 감각을 통해 새로이 느껴볼 수 있도록 한다.

"내가 드러내고 싶은 것은 여러 층위가 얽히고설켜 나타나는 세계를 가시화하는 작업이다. 나는 미술가보다는 ‘몽상적인 이미지의 예술을 만들어낸 공학자'라고 생각한다."

이기봉 작가 ©국제갤러리

1957년에 서울에서 태어난 이기봉은 서울대학교에서 수학했다. 1986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후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전시를 이어가고 있다. 주요 작품 소장처로는 한국 국립현대미술관, 호암미술관, 리움미술관, 독일 ZKM미술관 등이 있으며, 2021년 로스엔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ACMA)의 단체전에서 그의 작품이 소개되었다.

작가는 2016 창원조각비엔날레, 2012 폴란드 포즈난의 미디에이션 비엔날레(Mediations Biennale), 2011 모스크바 비엔날레, 2010 부산비엔날레, 2009 비엔날레 큐베(Biennale Cuvée), 그리고 2008 세비야 비엔날레(Sevilla Biennale) 및 싱가포르 비엔날레 등에 참여한 바 있다.

References